✦ 별이의 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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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Death) — 진짜 죽음이 아니야

어떤 집 베란다엔 이사 온 지 2년이 됐는데 아직 안 뜯은 상자가 하나 있었어. 겉에 매직으로 '기타'라고만 적혀 있고. 별이가 창턱에서 몇 번을 봤는데, 사람이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눈길은 주더라. 손은 안 가고 눈만 가는 상자.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사실 그 사람도 알고 있었을 거야.

타로 카드 중에서 이름 때문에 제일 오해받는 카드가 이거야. 메이저 13번, 죽음. 이 카드가 나오면 덜컥 겁부터 나지? 별이가 분명히 말할게 — 이건 실제 죽음을 뜻하는 게 아니야. 누가 아프다거나 무슨 일이 생긴다는 예고도 아니고. 카드는 그런 걸 예언하지 않아.

이 카드의 주제는 '끝'보다 '끝의 수용'에 가까워. 여기서 한 겹만 더 들어가 볼게.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건 대체로 끝난 일 자체가 아니야. 이미 끝났는데 아직 끝났다고 안 해둔 상태지. 관계는 끝났는데 사진첩은 그대로고, 그만두기로 했는데 알림은 계속 오고, 마음은 떠났는데 매달 돈은 나가고. 그렇게 끝난 자리로 시간과 기운이 계속 새어 나가는 게 진짜 피곤한 부분이거든.

여기서 자주 갈리는 지점이 하나 있어. 이 카드가 나왔으니 그걸 끝내라는 뜻이냐고 묻는 사람이 많아. 근데 그건 거꾸로야. 카드는 뭘 끝내라고 시키지 않아. 이미 끝나 있는 게 있는지 보라고 할 뿐이지. 끝내는 건 사람이 내리는 결정이고, 카드 한 장이 그걸 대신 정해주진 못해.

근데 만약 지금 붙들고 있는 게 아직 살아 있는 거라면 얘기가 아예 달라져. 연락이 오가고, 아직 서로 서운하기도 하고, 손볼 여지가 남아 있는 상태. 그건 끝난 게 아니라 어려운 구간이야. 이 둘을 구분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해. 지난 2주 동안 실제로 오간 게 뭐가 있었는지 세 보는 거야. 머릿속에서 혼자 한 대화 말고, 밖으로 나온 것만.

그림엔 밤과 새벽이 같이 있어

그림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훑어봐. 왼쪽엔 마른 잎들이 바람에 흩어지고 있어. 지나간 쪽이지. 근데 그 잎들 사이에 작은 별들이 섞여 있어. 끝난 것에서 가져올 게 아주 없진 않다는 뜻으로 별이는 읽어. 가운데엔 고양이가 있고, 쓰러져 있지 않아. 걷는 중이야. 이쪽을 향해서, 평소 걸음으로.

오른쪽으로 눈을 옮기면 풀밭에 별 모양 꽃이 크게 피어 있어. 왼쪽 잎보다 훨씬 선명하지. 그리고 길이 능선 쪽으로 굽어 있고, 그 너머로 해가 올라오는 중이야. 재밌는 건 하늘엔 초승달이 아직 떠 있다는 거야. 밤과 새벽이 한 화면에 같이 들어 있어. 하나가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 다음이 오는 게 아니라, 겹치는 구간이 있다는 얘기지. 미련이 남은 채로 앞으로 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고.

바로 놓이면, 끝난 것을 붙잡고 있느라 쓰는 힘을 조금 덜어내라는 결이야. 다 정리하라는 말이 아니야. 그건 하루아침에 되지도 않고, 억지로 하면 나중에 더 크게 돌아오더라.

그래서 오늘 할 건 딱 하나면 돼. 실제로 종결되는 아주 작은 것 하나를 고르는 거야. 알림 하나 끄기, 사진 폴더 하나를 다른 이름으로 옮기기, 안 쓸 걸 아는 물건 하나 버리기, 베란다 상자 뚜껑만 열어보기. 마음의 정리는 뒤에 따라와도 괜찮아. 손이 먼저 가는 쪽이 대체로 덜 아프더라.

거꾸로 놓이면, 끝내야 할 걸 자꾸 미루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어. 나쁜 뜻은 아니고 잠깐 멈춘 자리야. 절차가 아직 안 따라온 것일 수도 있고, 겉으론 정리한 척하면서 속으론 아직 못 놓은 것일 수도 있어. 후자라면 놓는 연습보다 먼저 필요한 게 애도야. 끝난 걸 슬퍼하는 시간은 미루는 것과 다른 종류의 시간이거든. 그 무거움이 몇 주씩 이어지고 일상까지 흔든다면, 혼자 버티지 말고 가까운 사람이나 전문가에게 이야기해도 돼.

베란다 상자는 어떻게 됐냐면, 어느 밤에 뚜껑만 열려 있더라. 다 비우진 않았고 위쪽 몇 개만 꺼내 놨더라고. 별이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이름이 무섭게 생겼을 뿐이야. 이 카드는 어둠만 그려놓은 그림이 아니고, 화면 오른쪽엔 늘 다음 구간이 함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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