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여덟 시, 별이는 어느 집 베란다 난간을 소리 없이 걷고 있었어. 구석에 화분이 하나 있는데 잎이 영 시들해. 주인은 물을 주긴 줘 — 근데 화면에서 눈을 안 떼고 손만 뻗어서 주더라. 별이는 봤지. 그 잎 뒤에 조그만 새순이 하나 올라와 있는 거. 주인만 몰라. 별이가 별꼬리로 새순 쪽을 가리켜도 봤는데, 고양이 손짓은 원래 잘 안 통하더라.
권태기의 마음이 딱 그래. 나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심드렁해. 요즘 둘이 나누는 말은 시작하기도 전에 끝이 정해져 있어. 뭐 먹을래, 아무거나, 그럼 그거. 주말 계획을 세우다 말고 각자 휴대폰을 보다가 그대로 잠들고. 설렜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이대로 괜찮은 건가 싶고. 그 마음, 이상한 거 아니야. 오래 같이 걸으면 누구든 한 번은 지나는 구간이거든.
이럴 때 흔히 "설렘이 사라졌으면 끝난 거"라고들 해. 별이가 보기엔 순서가 좀 다른 것 같아. 설렘은 상대가 아직 낯설 때 나오는 감각이야. 그러니까 설렘이 줄었다는 건 마음이 줄었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 사람이 이제 낯설지 않다는 증거일 수도 있어. 문제는 익숙해진 것 자체가 아니라, 익숙해진 다음에 뭘 볼지를 아직 못 정한 거지.
별이는 화분 옆에 카드 한 장을 비췄어. 컵 4. 잔이 여러 개 놓여 있는데 고양이가 어느 쪽으로도 발을 안 뻗는 카드야. 옆에서 새 잔 하나가 다가오는데도 시선이 거기 안 닿고, 더 눈에 걸리는 건 이미 앞에 놓여 있던 잔들도 그대로 방치돼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이 카드가 짚는 건 "새 게 안 온다"가 아니라 "지금 손이 안 나가고 있다"야. 관계가 끝났다고 말하는 카드가 아니라, 조용히 이렇게 묻는 카드지. 이미 네 앞에 와 있는 좋은 것을, 지금 못 보고 있진 않아?
이 카드가 뒤집힌 결로 나오면 심드렁함이 초조로 바뀌기도 해. 밍밍한 게 견디기 힘들어서 뭐라도 일을 만들고 싶어지는 거야.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던져보거나, 오래된 대화창을 뒤져보거나, 관계랑 상관없는 데서 자극을 구해보거나. 별이는 그게 나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야. 다만 심심함이 만든 조바심으로 뭔가를 정하면, 나중에 그때 왜 그랬는지 나조차 설명이 잘 안 되더라.
그날 별이는 유리문 안쪽도 슬쩍 봤어. 두 사람이 소파 양 끝에 앉아 각자 화면을 보고 있는데, 한 사람이 자기 무릎에 있던 담요를 보지도 않고 옆으로 밀어주더라. 받은 사람도 눈은 화면에 둔 채로 그걸 끌어당기고. 둘 다 방금 자기들이 뭘 했는지 몰라. 별이만 봤지. 그런 장면은 대화보다 조용해서 정작 본인들 기억엔 안 남거든.
권태는 마음이 식었다는 판정이 아니라, 눈이 잠깐 무뎌졌다는 신호일 때가 많아. 당연해져서 안 보이게 된 다정함 — 늘 같은 자리에 있어서 오히려 눈에 안 걸리는 것들 말이야. 물론 상대의 마음까지 별이가 대신 읽어줄 순 없어. 그건 그 사람만 아는 거니까. 다만 네 쪽 눈은 오늘 다시 떠볼 수 있잖아.
근데 시들한 게 이 관계만이 아니라면 얘기가 달라져. 좋아하던 음악도 재미없고, 친구 약속도 자꾸 미루고, 자고 일어나도 개운하지가 않다면 — 그건 관계 문제라기보다 네 배터리 쪽 문제에 가까워. 그럴 땐 관계를 붙들고 답을 찾기 전에 네 쪽을 먼저 쉬게 해주는 게 순서야. 반대로 심드렁함 밑에 말 못 한 서운함이 깔려 있는 거라면, 그건 권태가 아니라 아직 안 꺼낸 이야기고. 그쪽은 관찰이 아니라 대화가 필요한 자리지.
오늘 밤 할 수 있는 건 크지 않아. 이 관계에서 최근에 고마웠던 것 딱 하나만 떠올려봐. 큰 거 말고, 네가 답을 늦게 했는데 아무 말 안 해준 날 같은 사소한 거. 그리고 가능하면 그 하나를 소리 내서 옮겨봐. "그때 고마웠어" 한 문장이면 충분해. 답이 어떻게 돌아오든, 최소한 네 눈은 다시 초점을 잡거든.
계속 걸을지, 어떻게 걸을지는 그다음에 네가 정하면 돼. 별이가 대신 정해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어. 별이는 내일 밤에도 그 베란다에 들러볼 생각이야. 주인이 그 새순을 알아보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지금 이 관계엔 어떤 카드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