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이의 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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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기분이 가라앉는 날

초저녁부터 별이는 어느 건물 옥상, 물탱크 옆 평상에 엎드려 있었어. 하늘엔 뿌연 구름 뒤로 달이 흐릿하게 걸려 있었고. 옥상 문이 끼익 열리더니 슬리퍼 차림의 사람이 하나 올라와, 별이가 있는 줄도 모르고 평상 반대쪽 끝에 털썩 앉더라. 뭘 하러 온 게 아니라, 그냥 숨 쉬러 온 얼굴이었어.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마음이 축 가라앉는 날, 있지. 이유를 찾아보려 해도 잘 안 잡히는 날. 근데 별이는 그런 날 이유를 캐는 걸 권하지 않아. 흐린 하늘한테 "왜 흐려?"라고 따져 물어봤자, 하늘도 할 말이 없거든.

이런 날은 티도 잘 안 나. 밥도 먹고 답장도 하고 할 일도 대충 해내. 다만 물속에서 걷는 것처럼 모든 동작이 한 박자씩 늦고, 웃을 타이밍에 웃는 것마저 일처럼 느껴지지. 저녁엔 한 것도 없이 지쳐 있고, 침대 끝에 앉아 신발도 못 벗은 채 십 분쯤 그냥 있게 되고. 옥상까지 올라온 그 사람도 딱 그 얼굴이었어. 큰일이 난 얼굴이 아니라, 아침부터 배터리가 30퍼센트였던 얼굴.

별이는 별꼬리를 평상 쪽으로 늘어뜨려 카드 두 장을 비췄어. 달 — 오늘 하늘이랑 똑같이 어렴풋하고 모호한 마음. 그리고 컵 5 — 마음 한구석의 옅은 아쉬움. 둘이 같이 나오면 별이는 이렇게 읽어. "오늘은 억지로 답을 내지 않아도 되고, 밝은 척은 더더욱 안 해도 되는 날."

달 카드엔 물길이 하나 있어. 그리고 그 물 위에 길이 한 번 더 비쳐. 그래서 언뜻 보면 길이 두 갈래처럼 보이지. 하나는 실제로 밟을 수 있는 길이고, 하나는 비친 것뿐인데 말이야. 가라앉은 날의 생각도 딱 이래. "나 원래 이런 사람인가", "다들 나만 빼고 잘 지내는 것 같은데" 같은 문장들 — 진짜처럼 또렷한데 발을 디뎌보면 물이야. 오늘 떠오른 결론을 그렇게까지 믿어주지 않아도 돼. 흐린 밤엔 눈에 들어오는 게 절반뿐이니까.

컵 5는 옆에서 조용히 거들 뿐이야. 마음 구석에 엎어진 잔 몇 개가 아직 놓여 있다는 것. 근데 오늘은 남은 잔을 세어보라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야. 기분이 가라앉으면 다들 "긍정적으로 생각해" 하면서 방향부터 돌리라고 하잖아. 별이가 보기엔, 시야가 흐린 날에 억지로 방향을 틀면 방향만 잃어. 오늘은 그냥 흐린 채로 있어도 되는 날이야.

그런 날의 할 일은 하나도 안 대단해. 큰 결정은 내일로 미루기, 따뜻한 거 한 잔, 좋아하는 노래 하나, 그리고 이불까지 무사히 도착하기. 거기까지 하면 오늘 몫은 다 한 거야. 하나만 덧붙이자면, 오늘은 오래된 대화방이나 남의 SNS를 여는 날로는 최악이야. 흐린 눈으로 보면 뭐든 다 나보다 밝아 보이거든.

근데 만약 이게 오늘 하루가 아니라면 — 지난 몇 주가 계속 이랬고, 좋아하던 것들이 하나씩 시들해졌고, 잠이나 밥의 모양이 눈에 띄게 바뀌었다면 — 그건 흐린 날이라기보다 장마 쪽에 가까워. 장마는 하루 버티는 걸로 안 지나가고, 지붕을 손보는 일은 혼자 올라가서 할 일도 아니야. 그러니 이 무거움이 너무 오래간다 싶으면 곁의 사람이나 전문가에게 손을 내밀어 줘. 유난스러운 게 아니라, 비 올 때 우산 챙기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평상 반대쪽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서 봤더니, 그 사람이 별이 쪽으로 손을 반쯤 내밀었다가 멋쩍게 거두더라. 그러곤 그날 처음으로 옅게 웃고는 내려갔어. 별이는 남아서 구름을 더 지켜봤는데, 한참 뒤에 구름이 밀려간 자리로 달이 잠깐 얼굴을 내밀었어. 딱 삼 분. 아무한테도 안 보여주고 다시 숨더라. 오늘 그걸 못 본 사람은 내일 몫으로 남겨두면 돼. 오늘 밤 뭘 할지, 아무것도 안 할지는 네가 고르면 되고 — 오늘만큼은 안 고르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야.

흐린 채로 두어도 괜찮은 밤이야. 그래도 한 장 궁금하다면. 무료로 뽑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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