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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시작해도 될까

막차 지하철엔 이상하게 솔직한 얼굴들이 실려 가. 조는 얼굴, 지친 얼굴, 그리고 오늘은 — 실실 웃는 얼굴 하나. 별이는 맨 끝 칸 구석에 얌전히 앉아 있었어. (고양이가 어떻게 탔는지는 묻지 말자. 고양이 일이야.) 그 사람은 휴대폰을 보다가 웃고, 창밖 어둠을 보다가 또 웃고, 그러다 문득 웃음을 거두고 한숨을 쉬었어. 설렘과 걱정이 같은 칸에 타고 있더라.

별이는 그 손을 봤어. 대화창에 답장을 다 써놓고도 안 보내고 있더라. 3분 만에 보내면 너무 빠른가, 10분쯤 두면 적당한가 — 그런 계산을 하는 손이었어. 계산이 끝나기도 전에 또 실실 웃고.

좋은 사람이 나타났을 때, 이상하게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좋다'가 아니라 '어떡하지'일 때가 있지. 시작해도 될까. 또 다치면 어쩌지. 지난번처럼 되면 어쩌지. 마음은 이미 출발했는데, 머리가 자꾸 비상 정지 버튼을 찾는 거야.

그런 밤엔 안 열어본 지 오래된 사진 폴더 이름이 괜히 떠오르고, 그때 들었던 말 한 줄이 자막처럼 지나가기도 해. 겁이 나는 건 네가 겁쟁이라서가 아니야. 진짜로 다쳐본 적이 있어서 그래. 머리는 잊었는데 몸이 먼저 기억하는 거지.

별이가 어두운 차창에 비춘 카드는 컵 에이스와 연인이야. 컵 에이스는 잔에 마음이 새로 차오르는 카드 — 말라 있던 자리에 다시 물이 도는 거, 그거 생각보다 흔한 일 아니야. 그리고 연인은 사랑을 보장해주는 카드가 아니라 방향을 고르는 카드야. 둘이 같이 나오면 별이는 이렇게 읽어. "지금 차오르는 그 마음은 진짜야. 이제 그걸 어디로 흘려보낼지 고르는 건 네 차례고."

컵 에이스 그림에서 눈여겨볼 건, 잔이 이미 넘치고 있다는 점이야. 채워지는 중이 아니라 넘치는 중. 그리고 고양이가 그 잔을 두 팔로 감싸 받쳐 들고 있어. 밀어내지도, 급하게 흔들지도 않고 그냥 안고 있는 자세지. 마음이 커진 게 문제였던 적은 별로 없더라. 넘친 그 물이 어디로도 못 흐르고 고여만 있을 때가 늘 문제였지.

연인 카드도 가까이 보면 재밌어. 두 고양이가 나란히 앉아 있는데, 한 마리는 앞을 보고 한 마리는 곁을 보고 있어. 위로는 별과 꽃으로 된 아치가 둘을 함께 덮고 있고. 가까이 앉았다고 해서 같은 곳을 보고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야. 그게 나쁜 신호는 아니고, 앞으로 같이 맞춰갈 몫이 남아 있다는 얘기야.

미리 말해둘게 — 이 두 장이 비추는 건 전부 네 쪽이야. 그 사람 마음까지는 카드의 불빛이 안 닿아. 거긴 그 사람의 영역이거든. 근데 "시작해도 될까"라는 질문의 답은 애초에 그쪽에 있지 않아.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천천히 알아가면 되는 거고, 오늘 확인할 수 있는 건 딱 하나야. 그 사람을 떠올릴 때 네 마음이 설레서 차오르는지, 불안으로 출렁이는지.

확신이 서면 시작하라는 말이 있잖아. 별이가 오래 지켜본 바로는 순서가 좀 반대인 것 같아. 확신은 시작하기 전에 완성돼서 배달되는 게 아니라, 몇 계절을 같이 지나면서 느리게 쌓이는 쪽에 가깝더라. 그러니 확신이 없어서 못 하겠다는 말은, 사실 지금은 준비가 덜 됐다는 다른 말일 수도 있어. 그것도 충분히 정당한 이유고.

그리고 만약, 지난 일이 아직 문득문득 튀어나와서 지금 이 사람한테 괜한 화가 나거나 아직 없는 일을 미리 겁내게 된다면 — 그건 시작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네가 여전히 회복하는 중이라는 신호야. 서두를 이유 없어. 그 무게가 혼자 감당이 안 될 만큼이면 곁의 사람이나 전문가한테 기대도 되고.

상처받을까 봐 미리 문을 잠그는 건 안전해 보여도, 좋은 것까지 문밖에 세워두는 일이야. 그렇다고 서두르란 얘기도 아니고. 잔은 급하게 채우면 넘치니까, 천천히 하면 돼. 다만 문 앞까지 와서 찰랑이는 마음한테, 오늘은 모른 척 말고 인사 정도는 해줘도 되지 않을까.

지하철이 지상 구간으로 올라오면서 차창이 잠깐 환해졌어. 밖이 보일 땐 얼굴이 안 보이고, 다시 어두워지면 얼굴이 비쳐. 그 사람은 두 화면을 번갈아 보다가 아까 써둔 답장을 그냥 보내더라. 뭐라고 썼는지는 별이도 안 봤어. 그건 그 사람 칸의 일이니까. 오늘 밤 네 답장을 언제 보낼지도, 정하는 사람은 너야.

지금 이 마음을 한 장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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