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의 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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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야에 잠 안 올 때, 생각이 안 눕는 밤

여름밤의 고양이한테는 저마다 피서지가 있어. 별이 건 하천 다리 밑, 물바람이 지나가는 넓적한 돌 위야. 새벽 두 시, 거기 배를 깔고 있는데 산책로 벤치에 누가 털썩 앉는 소리가 났어. 얼음컵을 든 사람이었어. 운동복도 아니고, 산책 나온 걸음도 아니고. 몸은 젖은 수건처럼 축 처졌는데, 눈만 말똥한 얼굴.

별이는 저 얼굴을 알아. 침대에서 한참 뒤척이다 백기 들고 나온 얼굴이야. 며칠째 이어지는 열대야에 눕기 전까진 분명 눈이 감기게 피곤했는데, 막상 누우니까 생각이 벌떡 일어나는 거. 낮엔 조용하던 걱정들이 밤에만 줄을 서서 찾아오고, 누웠다 앉았다 시간이나 보려고 든 휴대폰에 눈만 더 말개지고. 몸은 껐는데 머리에 불이 안 꺼지는 밤, 요즘 이런 밤 보내는 사람 많더라.

이런 밤의 순서는 대체로 정해져 있어. 처음엔 내일 해야 할 일이 와. 그다음엔 오늘 한 말 중에 조금 이상했던 문장 하나가 와. 그게 왜 이상했는지 오 분쯤 검토하고 나면, 어느새 삼 년 전 일까지 소환돼 있지. 그쯤에서 시계를 봐. 세 시 십이 분. 그리고 지금 자면 몇 시간 잘 수 있는지 계산을 시작해. 그 계산이 시작되면 그날 잠은 사실상 끝난 거야. 잠은 계산당하는 걸 제일 싫어하거든.

별이는 벤치 옆자리에 카드 한 장을 비췄어. 소드 9. 한밤중, 침대 위에 일어나 앉은 고양이 그림이야. 그 머리 위 밤하늘엔 검 아홉 자루가 깃털처럼 매달려 있고. 무섭게 생겼지? 근데 잘 봐. 그 검들, 전부 공중에 떠 있기만 해. 단 한 자루도 고양이한테 닿아 있지 않아. 밤에 몰려오는 생각이 꼭 이래. 실제보다 훨씬 크고 날카로워 보이는데, 정작 내려오지는 못하거든.

그림에서 별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사실 검이 아니라 침대 한쪽에 놓인 작은 촛불이야. 아홉 자루가 머리 위에 떠 있는 밤에도 그 불은 안 꺼져 있어. 잠은 못 자도 밤이 통째로 어두운 건 아니라는 얘기지.

그리고 하나 더. 검은 늘 아홉 자루로 고정인데, 어떤 밤은 견딜 만하고 어떤 밤은 도무지 안 되잖아. 달라지는 건 걱정의 개수가 아니라 그걸 받아내는 몸의 상태거든. 며칠을 못 잤는지, 오늘 뭘 먹었는지, 어깨가 얼마나 굳어 있는지. 그러니까 밤에 생각이 유난히 부풀었다면 네 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라, 대체로 몸이 먼저 지친 거야. 자기 탓 목록에서 한 줄쯤은 지워도 돼.

그러니까 이 카드는 "큰일 났다"는 경고가 아니야. "지금은 생각이 부풀어 보이는 시간대야"라는 표시에 가까워. 새벽 세 시는 인생을 재판하기엔 영 좋은 법정이 아니거든. 그 시간에 내린 결론은 아침 햇빛 아래서 다시 보면 절반쯤 딴소리인 경우가 많더라. 그러니 오늘 밤엔 답을 내려고 애쓰지 말고, 판결은 내일 낮의 너한테 넘겨. 밤의 너는 접수만 하는 거야. "그 걱정, 접수됐어. 처리는 내일." 언제 심리를 열지는 네가 정하면 되고.

접수에도 요령이 있어. 머릿속으로만 하면 자꾸 재접수되니까, 손 닿는 데 종이랑 펜을 두고 한 줄씩 적어. 해결책 말고 걱정만. "병원 예약", "그 말 사과할지 말지" — 이 정도로 짧게. 다 적고 나면 이상하게 목록이 생각보다 짧아. 머리는 세 개를 서른 개처럼 굴리는 재주가 있거든. 그리고 정 안 되면 오늘 저 사람처럼 그냥 나와도 돼. 침대에서 억지로 버틴 한 시간보다, 밖에서 바람 십 분 쐬고 들어간 밤이 나을 때가 많더라.

흔히 "일찍 자려고 노력해라"라고들 하는데, 잠은 노력이 잘 안 먹히는 몇 안 되는 분야야. 잘하려고 애쓸수록 몸에 힘이 들어가는 종류라서, 쫓아가면 오히려 멀어져. 그러니 오늘 목표는 '자는 것' 말고 '눈 감고 쉬는 것' 정도로 낮춰도 괜찮아. 못 자도 실패가 아니라는 걸 아는 순간부터 밤이 조금 헐거워지거든.

그리고 이건 별이가 진지하게 하는 말인데 — 이런 밤이 몇 주씩 이어져서 낮까지 휘청인다면, 그건 의지로 버틸 일이 아니라 곁의 사람이나 전문가에게 물어봐도 되는 일이야. 그건 유난이 아니라 정비에 가까워.

그 사람은 얼음컵의 마지막 조각을 오도독 씹고 일어났어. 잘 수 있어서가 아니라, 자려고 애쓰는 것도 그만하기로 한 얼굴로. 잠은 쫓아가면 도망가는 고양이 같은 데가 있어서, 등을 보이고 딴청을 부리면 슬그머니 곁에 와 눕기도 하거든. 오늘 밤 눕든 나오든, 어느 쪽을 고르든 내일의 너는 오늘의 너를 그렇게 나무라지 않을 거야. 별이는 다리 밑 돌 위에서 먼저 눈을 붙일게. 이 방면의 시범 조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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