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아홉 시의 한강 다리는 생각보다 붐벼. 뛰는 사람, 자전거, 통화하며 걷는 사람. 별이는 난간 아래 조명 박스 위에 앉아 그 행렬을 구경하고 있었어. 그중에 한 사람만 걸음이 자꾸 느려지더라. 집에 가는 길일 텐데, 몸은 앞으로 가는데 고개는 자꾸 왔던 쪽으로 돌아가. 방금 온 길을 확인하는 사람처럼.
지난 일이 자꾸 떠오르는 밤이 있지. 오래전에 끝난 장면인데 어제 일처럼 선명하고, 분명 지나왔는데 마음 절반은 아직 거기 서 있는 것 같은. 별이는 그게 뭐였는지 캐묻지 않을게. 다시 꺼내서 들여다보는 건 오늘 밤 할 일이 아니거든.
게다가 과거는 예의가 없어. 약속이라도 잡고 오면 마음의 준비라도 할 텐데, 늘 아무 때나 와. 샤워하다 물소리 사이로, 신호 기다리며 건너편 간판을 보다가, 넘겼어야 할 노래의 첫 소절에. 그러고는 십 분쯤 그 자리에 사람을 세워두고 슬쩍 사라져. 그 십 분 동안 한 일이라곤 서 있었던 것뿐인데 이상하게 진이 다 빠지지.
대신 다리 아래를 봐. 강물 위로 작은 배가 하나, 불을 달고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어. 별이가 비춘 카드도 딱 그거야. 소드 6. 짐을 싣고 잔잔한 물 쪽으로 건너가는 배의 카드. 이 카드의 다정한 점은, 짐을 버리라고 안 한다는 거야. 배엔 칼 여섯 자루가 그대로 실려 있어. 다 안고 가. 그래도 배는 가. 과거는 지워야 건너지는 게 아니라, 실은 채로도 건너지더라.
이 그림에서 별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사실 물이야. 파도가 아니라 잔잔한 물. 그러니까 이 배는 폭풍을 뚫고 도망치는 중이 아니라, 이미 격랑을 지나온 배야. 그 말은 네가 아직 한복판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소리가 잦아든 구간에 들어섰다는 쪽에 가까워. 조용해지고 나서야 짐 무게가 느껴지는 거지. 시끄러울 땐 무거운 줄도 모르니까. 요즘 유난히 옛일이 떠오른다면, 그건 나빠진 게 아니라 이제야 돌아볼 여유가 생긴 신호일 수도 있어.
함께 나온 심판은 정리의 카드야. 지난 것들에게 "여기까지"라고 조용히 도장을 찍고, 조금 가벼워진 아침으로 깨어나는 것. 그림 속 고양이는 구름 위에 서서 두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어. 머리 위엔 작은 종들이 줄줄이 걸려 있고. 부름은 이미 와 있는데 응답만 아직인 자리라는 뜻이지. 그게 지금 네 위치라는 말이지, 늦었다는 말은 아니야.
흔히들 "과거를 극복해야 앞으로 간다"고 하잖아. 별이가 보기엔 순서가 반대일 때가 더 많아. 앞으로 가다 보면 어느 날 그 장면이 예전만큼 아프지 않다는 걸 뒤늦게 알아채는 쪽. 억지로 잊으려 애쓰면 오히려 더 선명해지잖아. 잊는 건 애초에 목표로 세울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야. 그냥 배에 실어두고, 노를 젓는 거야. 오늘 젓는 만큼만.
그러니 오늘 밤은 그 장면을 한 번 더 돌려보는 대신 뱃머리 쪽을 보자. 지나온 물살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결말은 안 바뀌지만, 앞을 보고 있으면 다음 장면이 달라질 여지는 생기거든. 혹시 그 짐이 혼자 들기엔 너무 무거운 종류라면 — 떠올릴 때마다 몸이 굳거나 잠이 달아나는 종류라면 — 곁의 사람이나 전문가에게 노를 잠깐 같이 저어달라고 해도 돼. 배는 혼자 저으라고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야.
오늘 밤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야. 그 장면이 또 찾아오면 밀어내려고 씨름하지 말고 "왔구나" 하고 옆자리에 앉혀둬. 쫓아내려는 시간이 제일 길거든. 그리고 노는 딱 한 번만 저어. 미뤄둔 메시지 하나를 보내든, 안 여는 사진 폴더 하나를 안 보이는 데로 옮기든, 십 분 일찍 눕든. 한 번 저은 배는 노를 놓아도 조금 더 나아가.
다리 위의 그 사람은 결국 걸음을 멈추고 난간에 기대 아래를 한참 봤어. 그러곤 어느 순간, 뒤가 아니라 강 쪽을 보고 있는 자기를 발견한 얼굴로 다시 걷기 시작하더라. 강 한가운데서는 얼마나 왔는지 잘 안 보여. 그래도 배는 계속 가고 있어 — 네가 노를 놓은 밤에도, 물살이 대신 밀어주면서. 어느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릴지는, 배에 탄 사람이 고르는 거고.
오늘의 한 장으로 마음 정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