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는 요즘 밤마다 흙 밟는 재미로 다녀. 여름엔 낮의 열이 밤까지 남아서 발바닥이 뜨끈했는데, 9월 들어서니 흙이 먼저 식더라. 발끝이 서늘해지는 그 감각이 오면 계절이 한 칸 넘어간 거야. 그 발로 주민센터 뒤편 자투리 텃밭까지 걸어갔어. 한 칸씩 나눠 쓰는 상자 밭 있잖아. 가로등 불빛이 반만 닿아서 이쪽은 환하고 저쪽은 깜깜한 자리야.
환한 쪽에 사람이 하나 서 있었어. 물뿌리개를 들고 왔는데 정작 쓰지는 않더라. 상자 안엔 여름내 웃자란 풀이랑 말라붙은 줄기가 엉켜 있고, 꽂아둔 팻말엔 4월 날짜랑 자기 이름이 적혀 있었지. 그 사람이 휴대폰을 열었어. 메모 제목이 '올해 할 것'. 항목은 아홉 개인데 체크는 두 개. 다 읽고 나서 스크롤을 맨 위로 올려 처음부터 또 읽더라.
9월 첫 주엔 이 표정이 부쩍 늘어. "벌써 9월이라고?" 소리를 하루에 두 번쯤 하게 되는 주간이거든. 달력을 열면 남은 칸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1월에 적은 문장들은 그새 남이 쓴 것처럼 낯설어져. 그러다 하반기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짜야 하나 싶어지고. 운동, 자격증, 저축, 이직 준비. 그 아홉 줄을 적을 땐 분명 신났을 텐데, 지금은 아홉 줄이 나란히 서서 채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이런 밤에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결론은 대체로 '내가 의지가 약해서'야. 근데 별이는 그 결론을 잘 안 믿어. 그 목록을 쓴 사람은 1월의 너잖아. 3월에 뭐가 무너질지, 여름에 누가 아플지, 8월의 네가 얼마나 지쳐 있을지 하나도 모르는 채로 쓴 거야. 모르는 사람이 짠 일정을 다 아는 사람이 못 지켰다고 혼나는 건 아무래도 순서가 이상하잖아. 그 아홉 줄은 채점표로 쓰기엔 정보가 한참 모자란 종이야.
팻말 기둥에 카드 두 장을 비스듬히 기대 세워뒀어. 먼저 펜타클 기사. 흰 고양이가 두 발로 흙길을 걸어오는 그림이야. 초록 천가방을 메고 있고, 그 안엔 별 무늬가 새겨진 금색 원반이 딱 하나 들어 있어. 하나뿐이고, 걸음도 안 빨라. 한 번에 하나만 지고 가는 걸음이지. 근데 눈여겨볼 데는 양옆이야. 길 양쪽으로 밭고랑이 줄줄이 갈려 있거든. 저 고랑이 오늘 아침에 생겼을 리는 없지. 그림 속 고양이는 그 고랑 사이를 지나는 중인데, 앞만 보느라 옆을 한 번도 안 봐.
그리고 흙길 가장자리엔 작은 노란 꽃들이 피어 있어. 저건 아무도 심지 않은 거야. 목록에 칸이 없었는데 올해 네가 한 것들이 딱 저 모양이더라. 미루던 병원에 결국 간 날, 한 달을 끌던 통화를 끝낸 오후, 하나 그만두기로 한 결정, 여름 어느 밤에 누군가 곁에 있어준 시간. 체크박스가 없어서 체크도 못 받았지.
옆에 세워둔 힘 카드도 봐. 흰 고양이가 앉아서, 금빛 유성이 터지는 자리에 앞발 끝을 살짝 얹고 있어. 발끝이 닿은 데서 빛이 튀고, 거기서부터 긴 꼬리가 왼쪽 아래로 뻗어 나가. 누르거나 붙잡는 자세는 어디에도 없어. 자기를 다루는 힘이 저렇게 생겼더라. 발끝 하나 얹는 정도로 방향이 잡히는 거야. 왼쪽 위엔 초승달이 걸려 있는데, 아직 다 차지 않은 달이야. 지금 눈에 보이는 게 그 달의 전부는 아니잖아. 9월도 딱 그쯤이고.
오른쪽 아래엔 점선으로 이어 놓은 별자리가 하나 있어. 그 점선이 마음에 들어. 하늘에 실제로 떠 있는 건 낱낱의 빛뿐이고, 그걸 잇는 선은 나중에 사람이 그은 거잖아. 1월에 적은 아홉 줄도 딱 그런 선이야. 안 맞으면 다시 그으면 되고, 선이 어긋났다고 하늘이 틀린 것도 아니고.
근데 만약 그 목록에 3년째 그대로 넘어오는 항목이 있다면 얘기가 좀 달라져. 그건 애초에 남들이 좋다길래 받아 적은 줄일 수도 있어. 해마다 옮겨 적히기만 하고 한 번도 손이 안 갔다면, 그 줄은 네 마음이 계속 비켜 간 자리인 셈이고. 그럴 땐 올해 안에 해치울 방법을 찾기 전에, 그 줄을 지워도 되는지부터 한번 물어봐.
그 메모 아직 안 닫았으면, 오늘 밤엔 하나만 해봐. 목록 밑에 칸을 하나 더 만드는 거야. 제목은 '안 적었는데 한 것'. 세 줄만 채워보면 돼. 잘 안 떠오르면 지난달들로 하나씩 되짚어보면서 찾아도 되고. 세 줄이 채워지고 나면 위쪽 아홉 줄이 아까랑 좀 다르게 보이기도 하더라.
이건 진지하게 덧붙일게. 이 자책이 몇 주째 밤을 갉아먹고 아침마다 몸을 눌러앉힌다면, 계획을 더 촘촘히 세운다고 나아지는 종류가 아니야. 혼자 곱씹지 말고 가까운 사람한테 소리 내서 털어놓거나, 전문가랑 한번 얘기해봐도 돼.
그 사람은 결국 물뿌리개를 내려놓고 마른 줄기부터 뽑기 시작했어. 한 움큼 뽑아 상자 옆에 모아두니까 밑에 있던 흙이 드러나더라. 손바닥으로 흙을 한 번 꾹 눌러보고, 손을 털고 일어났지. 오늘 심은 건 하나도 없었어. 그래도 고랑은 다시 보였고.
별이는 상자 턱을 따라 걸으면서 흙 위에 앞발자국을 몇 개 남겨뒀어. 내일 아침에 저걸 보면, 밤사이 누가 다녀갔구나 하겠지.
올해 네 밭엔 어떤 고랑이 나 있을까? 오늘의 타로 보기 →

